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케리 (문단 편집) === 베트남전 참전 관련 논란 === 존 케리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여러 공적을 세운 것은 맞으나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과정에서 존 케리가 정말로 여러 훈장을 싹쓸이하고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의 대표격 인물로 불릴만큼 많은 전공을 세웠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2004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도중, Swift Boat Veterans for Truth(SBVT)라 불리는 참전용사 조직이 결정되어 존 케리의 전공에 반론을 제기했다. [[http://www.counterpunch.org/2013/07/26/what-john-kerry-really-did-in-vietnam|존 케리가 실제로 메달을 따기까지의 과정]] SBVT의 주장에 따르면, 존 캐리는 1968년 11월 17일에 베트남에 도착하였다. 이후 [[브라운 워터 네이비|고속정(swift boats)]] 에 자원하여 배속된 모양이다. [[브라운 워터 네이비]]들은 돌아다니며 보통 민간인, 어부, 그리고 농부들을 괴롭히거나 종종 죽이곤 했다. 주로 농부들을 위협하여 항복시키는 이 작전에서 케리는 대단히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12월 2일, 케리는 수로 중 하나에서 '''자신의 첫''' 정찰업무를 맡는다. 자정쯤 승조원들이 삼판(베트남 전통 어선) 하나를 발견했다. 케리는 섬광탄을 터트린 후 팀원들에게 고속정의 기관총 2정과 M16 라이플로 사격을 명했다. 케리는 어부들이 "가젤처럼 도망갔다(running away like gazelles)"라고 묘사했다. 그 과정에서 아마 아군의 총알 파편에 의해 매우 작은 부상을 팔에 입었고, 이 긁힌 상처를 통해 '''명예전장훈장(퍼플하트)'''를 받는다. 그나마도 아군이 응사했다거나 심지어 케리가 전장에 있었다는 것 조차 증거가 없다는 의혹이 있다. 하지만, 미국의 훈장수여는 엄격한 절차하에 행해질 것이기에 어쨌거나 전장에서 다친 것 자체는 사실이라면 메달은 '''절차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이 의혹은 케리 자신이 쓴 기록에서, 훈장이 수여된 9일 후인 1968년 12월 11일의 글에 그가 "우리는 아직 총을 맞지 않았기 때문에...(because we hadn’t been shot at yet...)" 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위키피디아]]에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career_of_John_Kerry|따르면]] 1969년 2월 20일 보 더 강에서 두번째 퍼플하트 훈장을 추가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속정들은 지원 헬기와 함께 갈 예정이었으나, 올라가던중 헬기가 공격을 받고 재급유를 위해 귀환하여 몇 시간 동안 참전이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케리의 기록에 따르면 더 늦어지기 전에 지원없이 빠져나가기로 하였다. 배들이 Cua Lon 강에 접근하던중 케리의 고속정이 RPG탄에 맞고 파편이 케리의 왼쪽 다리에 박혔으며,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물론 부상중에도 의무는 계속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두번째 명예전장훈장''' 을 받는다. 그리고 겨우 8일 후인 28일에 무려 '''"[[은성훈장]]"'''을 받는다! 공식적 수여 기록에는 그가 이 작전에서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성공적 작전을 수행하여 받았다고 기록한다. 하지만[[http://www.counterpunch.org/2013/07/26/what-john-kerry-really-did-in-vietnam|존 케리가 실제로 메달을 따기까지의 과정]]과 [[http://wspaper.org/article/1582|알렉산더 콕번의 글 번역]]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케리는 보기 드물게 호전적인 살인자였다. 그는 전투 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미국 귀환 후의 정치적 출세를 위해 명예전상(戰傷)훈장을 받으려고 3개월 동안 미쳐 날뛰었다. 케리는 스스로 베트남 남쪽 끝에 있는 안 토이로 갔다...주간 임무에서는 코브라 헬기들이 보트들을 지원했다. 네이팜탄과 고엽제로 황폐해진 강둑과 앙상해진 숲을 향해 코브라 헬기들은 기총소사를 해댔다... 주민들이 통행금지 제재를 받지 않는 낮이었다. 케리의 고속정이가0 운하를 따라 올라가고 있었고 코브라 헬기가 그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삼판 한 척과 맞닥뜨렸고 그 배에는 여러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헬기가 삼판 바로 위에서 맴돌다가 이내 기관총을 발사하기 시작했고 탄환이 바닥날 때까지 사격을 계속해 배에 탄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배를 침몰시켰다. 케리가 자신의 일기장에 남긴 후회의 말은 죽은 사람을 애도한 것이 아니라 탄환을 모두 소모한 헬기 조종사의 어리석음을 개탄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조종사는 “재무장을 위해 탄환을 남겨두라는 요청을 받았는데도 탄환을 다 소모해 버려, 엄호가 필수적인 지역에서 우리가 45분 넘게 엄호를 받지 못한 채 작전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참전 이후에 우리가 생각하는 공적이 아닌 다른 규정상의 공적을 통해 은성 훈장을 비롯, 훈장들을 쓸어 담았다는 것이다. 존 케리는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참전용사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꾸준히 내세우며 [[이라크 전쟁]] 정국에서 부시에 비해 우위를 잡고자 했으나[* 조지 W. 부시는 아버지와 달리 형편 없는 군 경력으로 이미지가 나빴다. 사실 부시 행정부에서 제대로 된 군 경력을 밟은 사람은 [[콜린 파월]] 등 극소수이며 전쟁광으로 유명한 [[딕 체니]] 같은 많은 네오콘 정치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군대 문턱도 안밟은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이런 '''과장된 전공 의혹'''이 드러나며 역풍을 맞았고, '''이는 존 케리가 2004년 대선에서 낙선하는데 큰 영향을 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